왜 다들 투린만 좋아할까?

미리내 (http://halzz.egloos.com)

실마릴리온 색인 작업을 위해서 정말 오랜만에 실마릴리온을 읽었습니다. 고등학교때 실마릴리온의 첫 장을 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죠. "야, 차라리 성경을 보지 그러냐." 개인적으로도 참 실마릴리온엔 엮인 추억이..라고 할 건 별로 없습니다만 <끝나지 않은 이야기> Unfinished Tales 를 읽을 때에 실마릴리온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 큰 핸디캡이 되어 내용 이해가 잘 안되었으니, 쯧쯧 이거야말로 낭패도 이런 낭패가.

좌우간 실마릴리온을 다시 읽으면서, 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인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이번에 새로 나온 <후린의 아이들>의 주인공인 투린, 투린 투람바르죠. 사실 그 챕터를 집중적으로 읽은 탓에 짜증이 난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냥 읽으면서 이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야,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어!" 참고로 말하자면 실마릴리온의 3대 민폐라면 다음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페아노르, 페아노르 아들들, 그리고 투린.
글쎄.. 투린의 행적을 여기서 정리하자면 요약하기도 길고 재미도 없을테니 간단히 이야기해볼까요? 간단히 정리하자면 투린의 일대기는 오해와 넘겨짚기, 자만과 '운명' 이 얽혀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자신이 크게 잘못하지 않은 일임에도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거나, 쉽게 남의 말에 속아넘어가고 또 자기 판단을 과신했죠. 물론 투린이 처한 상황이 매우 급박했고, 글라우룽의 주문에 걸리기도 했고, 뭐 다른 사정이 많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투린은 톨킨의 다른 이야기에 나오는 영웅들 보다는 많이 모자란 모습을 보여주지요. 게다가 잘못된 판단으로 민폐는 어찌나 많이 끼쳤는지. 거두어 키운 싱골과 멜리안에게 늘 걱정을 끼치고, 얹혀살던 나르고스론드를 잘 지키긴 했지만 나르고스론드의 몰락을 이끌어 온 것도 어떤 면에서는 투린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에요. 게다가 남의 애인까지 뺏었어요! 아악..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그런 투린은 그야말로 그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할 인기를 누린 인기남이었다는겁니다. 어머니의 사랑, 벨레그와 귄도르의 신뢰, 핀두일라스의 사랑, 멜리안과 싱골의 사랑, 브레실 사람들의 신뢰, 그리고 누이이자 연인이었던 니에노르 니니엘의 사랑.... 심지어 모르고스의 저주까지도 한 몸에 받은 인간이었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 투린, 난 네가 정말 싫은데.


[믿거나 말거나 귄도르의 일기로 추정되는 문서(의 번역 및 필사본)]


왜 투린을 싫어하냐구요? 우선 이름이 너무 많아요. 톨킨의 작품 중에 이름 많은 사람치고 그럴듯한 인간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치겠지만, 어쨌든 뭐 이렇게 별도의 호칭이 많은지 읽다보면 용투구님인지 모르메길인지 아가르와인인지 뭔지 내 알바 아녀~ 라고 하게 되죠. 게다가 이름 숨기고 자기 아닌 척 하는 것도 짜증나요. 그리고 다른 이름을 지어서 못된 짓도 하고다니고.. 아니 뭐 자기가 닉네임 여러개 만들어서 다른사람인척 하는 키보드워리어? 오 노.. 이건 아니죠.


['네이산'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근원, 사이로스의 죽음.
투린이 좀만 똑똑했으면 이렇게 해결은 안 났겠죠.]


그리고 더 싫은건 이유없이 인기가 많다는거에요. 아니 이렇게 민폐만 끼치는데 뭐 이리 인기가 많은건지 난 이해가 안된다니깐요. 귄도르는 투린이 '실수로' 벨레그를 죽이는 것을 뻔히 보고도 투린을 잘 거둬서 자기 집에까지 데려가 잘 살게 해주고 애인까지 빼앗기는군요. 벨레그 보세요 , 투린이 뭐가 좋다고 그냥 끝까지 쫓아다니다가... 고생하다 죽는거잖아요. 이게 뭐야! 투린이 인덕이 많은걸까요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나는 관대하~다~" 인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레드 얼럿! 투린이 오면 죽는다!]


게다가 성질은 또 얼마나 급하고 또 소심하기까지 한지.. 사이로스가 투린한테 잘못해서 결국엔 죽었죠. 투린은 싱골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투린의 행동은 항상 좀 지나친 면이 있어요. 아니, 많이 지나쳐요.) 그런데 지레 겁먹고 도망가서는 자기가 또 '박해받은 자' 래요. 얼씨구. "너 피해망상 있니?'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 자기한테 잘못한 거 있으면 무조건 칼부터 들이밀고 보는 것 같습니다. 얘야, 그러면 안된단다. 네가 그러면 전국의 수많은 소년소녀가장들이 버릇없다고 욕먹지 않니. ..음 따지고보면 소년소녀가장은 아니죠. 이 시점에서 니에노르에게 한 마디 하자면 넌 왜 엄마 말 안듣고 나돌아다니는거야! 이 시점에서 또 모르웬 여사님께 한마디 하자면 딸 이름을 뭐 이렇게 불길하게 지으셨나요 아니 그러니까 이게 아닌데.. 여기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자, 여기까지는 모르고스의 저주와 글라우룽의 독설 못지 않은 악담이었습니다만.. 왜 투린 이야기가 굳이 별도의 책으로까지 출간되었는가를 한번 생각해볼 때가 됐어요. 저는 투린 이야기를 무척 싫어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그리스의 비극을 연상시킵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요. 사실 그리스 비극은 '어차피 될 일은 다 되는겨~' 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건 맞는 말이지만, 한가지 더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요.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가진 '지혜' 를 행운으로 알고, 그것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러한 지혜를 통하여 그는 왕이 되었지만 사실은 비극으로 향하는 길이었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들이 벌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오만함' 입니다. 자신을 과신하는 것, 자신의 지혜를 과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입니다. 오이디푸스는, 그의 가족들은, 그에게 내려진 신탁을 피하기 위해 애썼고, 우리는 신탁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예정된 결말을 맞게 되죠. 어차피 일어날 일이니 일어났다, 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알고 있으니 이제는 피할 수 있다- 고 자만한다고 한들 그것이 벌어지지 않을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운명에 대한 도전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그 운명을 '다 알고 있다' 고 믿는 것이 문제이지요. 아이쿠, 더 이상은 제가 학식이 짧아서 말을 못하겠네요. 공부를 더 해야겠군요.

다시 투린 이야기로 돌아와 볼게요. 다들 그렇게 느끼시겠지만, 전 '투람바르' - 운명의 지배자 - 라는 이름이 매우 역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니니엘이 죽으며 이런 말을 하죠, '운명에 지배당한 운명의 지배자여!' 투린은 자신이 그 운명을 '지배'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투린은 늘 운명을 피하려 했습니다. 운명의 지배자라는 이름을 짓고도 그는 그 운명을 피하려고 애썼죠. 후린의 자식들에게 내려진 모르고스의 저주를, '피할 수 있다' 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운명은 재빠르게도 투린을 쫓아와 그를 죽음으로 몰았죠. 투린의 이야기는 단순히 가족간의 비극적 관계에서 벗어나서 생각하더라도,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와 비슷해 보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모두 주인공들은 정해진 운명을 피하려 애쓰죠.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자신들의 운명의 앞길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혹은 '지배할 수 있으리라' 고 생각합니다. 결말은 다들 알고 계시듯 파국이구요.


[그래 그래두 이건 니가 잘 한 일이지. 인정!]


여기서 저는 '그러니까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되는겨 노력같은거 하지마!' 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평소의 신조는 될일은 되고 안될일은 안된다 이긴 하지만) 내 앞길은 내가 '다 안다' 고 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저는 종교도 없고 신이야 있든 말든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우연은 단순히 '우연히 벌어진 일' 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투린이 갖고있는 문제는, 그 우연한 일들에서 어떠한 징후도,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데에 있어요. 투린은 보다 신중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픈 비극도 겪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존재가 인간입니다. 완벽하고 위대한 인간들이 넘치는 톨킨의 이야기 속에, 가끔은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흠 있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는 법이죠.


아아, 하지만 전 투린이 싫어요. 왜 다 도대체 투린만 좋아하는거야?


이상 조금은 불경하고 아무리 24시간을 고아도 영양가 없는... 미리내씨의 투덜투덜, 이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글쎄, 다음엔 누구 흉을 한번 봐 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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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lkino | 2007/05/14 23:03 | ~호빗식 농담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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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에스텔 at 2007/05/15 14:24
엄뭐허;;;; 이름 많고도 진정 뛰어나신 울 전하가 계시는데요오오오오...ㅠㅠ
저도 투린을 좋아하지 않아서 스아실 투린 이야기만 따로 나왔다는 얘기에
'끄악;;; 그걸로도 모자라서 얼마나 더 심장을 치게 만들려고!!!OTL' 했지만
뭐 어쩌겠어요. 톨킨 파슨이는 뭐가 됐든 끌려갈 수밖에요...크흐...ㅠㅠ
불쌍한 벨레그... 귄도르...(토닥토닥;;;;)
Commented by 미리내 at 2007/05/16 14:11
전하는 넘 잘나서 남들이 다 지어준 이름이니깐 무효~ 에요 ><)
Commented by 카방클 at 2007/05/18 09:07
아앗 재밌어요! 계속 글 올려주세요오오.
생각해보니 하나도 틀린게 없네요 -ㅁ- 왜 다들 못되먹은 짓만 골라하는 투린을 그리 좋아했을까나...
자기도 "모두 나만 좋아해" 라고 생각해서 오만해진건 아닐지도 모르겠슴다 @ㅅ@
Commented by almaren at 2007/05/18 21:02
저는 사실 투린이란 캐릭터에 그다지 호감이 안가내요. -_-;;;;
Commented by 금숲 at 2007/05/18 23:45
크캬캬캬캬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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